[아름다운 人터뷰] 다시, 연필을 깎는 시간 / 이현세 , 만화가

 

잠들기 전에 한 장의 그림을 더 그리고 해지기 전에 한 걸음 더 앞을 향해 나아갔다는 대한민국 만화계의 거장 이현세 화백(66). 그는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 마주하기 위해 뚜벅뚜벅 오늘을 걸어왔다. 그 보폭에 실린 자기 확신은 펜 심지에 담긴 굳은 심지(心志)를 종이 위에 펼쳐온 실존 그 자체였다. 자신의 페르소나인 까치라는 캐릭터가 완성된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만화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그는 40년간 펜을 놓지 않고 세상을 그려왔다. 어느덧 노년의 삶을 완보하며 보폭과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그를 서울 모처의 화실에서 만나보았다.

“50대부터 70부터는 아동과 노인을 위한 얘기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종이만화가 존재하느냐가 최대 변수였죠. 죽는 날까지 책상 위에서 종이와 펜으로 그릴 자신이 있었는데, 시장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큰 오산이었죠(웃음). 저는 아직도 손으로 그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원시인으로 살고 있는데,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작업할지 고민이에요.”

지난 1997년부터 세종대 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활약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써온 그는 내년이면 정년을 맞이한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수업 때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포기하지 않아야 자기 세상이 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을 믿고 가라는 것이란다. 아홉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유일한 남자가 되어버렸고, 적록 색약으로 미대를 포기해야 했던 그가 의지한 것은 만화창작에 대한 욕구였다. 그 창의적 열망 하나로 가진 것 없이 상경해 문하생 생활을 시작한 그는 당시의 자신을 세상에 날이 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어떤 길을 가야 하고, 뭐가 필요한지 최소한의 정체성에 대해 늘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적어도 만화작가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밥 먹는 것처럼 해야 해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다시 배가 고프듯, 오늘 그리고 내일 그려도 항상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내려는 갈망이 있어야 하죠. 저는 딱히 전문 영역도 없었고, 그저 넘치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소재를 찾아왔어요. 그만큼 오류도 많았지만, 늘 처음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공포의 외인구단><천국의 신><남벌><아마게돈><폴리스><버디> 등 작가의 변신의 욕망이 반영된 창작물 중 그가 특별하게 기억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잠시 고개를 숙인 그는 <국경의 갈가마귀>라고 대답했다. 할머니와 자신만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할머니 무릎에 앉아 수없이 들었던 그 이야기는 할머니의 개인사이자 구한말 국경 지역에 거주한 조선인들의 역사, 즉 우리의 역사였다. ‘경계인으로 산 그들은 과연 어느 나라 사람이었을까.’ 그때부터 품어온 정체성의 문제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가 되었다.

만약에 불이 나서 원고 하나만 들고 나와야 한다면 이 작품을 택할 것 같아요. 그다음은 <까치머리>. 까치시리즈의 기점이 됐거든요. <공포의 외인구단>도 빠질 수 없죠. 만화를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게 한 의미 있는 작품이니까요. 남녀노소 모두 만화를 읽어줌으로써 언론에서도 만화가라는 직업이 뭔지 다루게 됐고, 만화의 유해성과 유익성 등 담론도 형성됐죠. 영화로도 만들어지면서 대중화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해요.”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뀌는 동안 그는 변함없이 인생이라는 함수에서 상수로 존재했다. 이미 마라톤을 완주했지만 계속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노장의 얼굴에는 소년의 미소가 배어있었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게 찾아온 인생의 부침과 시련들은 삶의 공식을 복잡하게 만든 변수로 작용했다. 미완성작인 <천국의 신화>는 그에게 아픈 손가락이 된 것이다. 작가로서 6년이라는 시간을 결박당했던 그 시절, 가장 큰 압박으로 다가온 것은 자기 검열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작가로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던져놓고 심의실과 사전 심의를 놓고 투쟁해왔지 제 개인과의 투쟁은 없었어요. 그저 청춘의 일탈을 그렸을 뿐. 제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과연 내 만화에 독은 없는가. 순기능 외에 역기능은 없나. 나만이 정의이고, 내 만화에 사회악은 없는가. 6년간 재판을 하며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죠. 몇 년 전 네이버에서 <천국의 신화> 연재를 재개했는데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시대가 바뀌면서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결국 끝나지 않은 작품으로 끝나버렸죠. 그런데 뭐,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죠.”

먹을 갈 때 나는 냄새, 연필 깎을 때 나는 향나무 냄새,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종이에서 나는 잉크 냄새.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세 가지 냄새이다. 펜과 종이가 일으키는 마찰력과 작가의 창의력이 강렬한 에너지로 발현되는 수작업은 그가 추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후반부를 디지털로 작업해보니 확실한 장점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혼을 담아 일필휘지로 그려야 하는 수작업에 비해 수정이 쉽고 작업에 대한 긴장에서도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는 일장일단이 있으니 더 좋은 쪽을 택할 거라고 하면서도 약간은 혼란스럽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생산방식과 유통과정에 대한 고민은 웹툰이야기로 이어졌다.

만화에는 할리우드의 히어로물 시장, 유럽의 작가 시장, 일본의 망가 시장이 있어요. 남은 게 웹툰인데 이 블록을 잘 선점하면 한국이 네 번째 시장이 될 수 있겠죠. 물론 현재의 웹툰은 다양성과 질적 밀도의 문제를 극복해야 해요. 한국의 웹툰 시장은 사실상 포화상태지만 콘텐츠가 절대적인 시대이니 적어도 웹툰은 희망적이죠. 혼자 하는 작업이 단점이면서도 장점이 될 수 있거든요. 실험실처럼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것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게 곧 재산이죠.”

좋은 만화란 무엇인가. 수많은 질문의 자장에서 끌어낸 마지막 물음에 그는 아는 만큼 그리고, 느끼는 만큼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솔직할 때 타인도 공감한다는 것. 그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에 작가의 생명력을 대입했다. 한 작가의 시대는 저물어도 고유의 가치관을 지켜나갈 때 죽지 않고 사라진다는 얘기다.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고, 앞으로도 들려주고 싶다는 만화가 이현세. 그는 이 시대의 참 이야기꾼이었다.

 

. 김신영 편집장

©김중만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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